Chemi-say
도나스는 죄가 없다!
2026/09/08
입추를 지나고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이 시작됐습니다.
가을은 유난히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인데요.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 추석이 찾아오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가을,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 편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혈당이 높은 수준에서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음식을 가려 먹고 틈틈이 운동을 하건만 야속하게도 혈당은 좀처럼 정상 수준으로 돌아올 줄 모른다. 특히 탄수화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좋아하던 빵도 거의 끊다시피 했다. 먹더라도 맛없고 뻣뻣한 통밀빵을 몇 입 대다 마는 일이 대부분이다.
나는 유난히 빵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팥앙금이 들어간 빵을 특히 좋아했는데, 아마도 특별한 추억이 있어서일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을지로 골목 귀퉁이에는 구르마에서 꽈배기와 팥도나스를 튀겨 팔던 분이 계셨다. 커다란 솥에 기름을 끓인 뒤 능숙한 손놀림으로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 배배 꼬아 넣고, 또 어떤 것은 팥앙금을 넣어 동그랗게 빚어 기름 속으로 던지다시피 하면 노릇노릇한 꽈배기와 도나스가 둥둥 떠오르곤 했다. 몇 번 뒤집어 튀긴 뒤 큰 채에 건져 기름을 털어내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나의 최애 간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을 양은 쟁반 가득 깔린 설탕 위에 몇 번 굴리고 나면 새하얀 설탕을 뒤집어쓴 달콤한 도나스가 마침내 탄생했다.
어머니를 졸라 받은 돈으로 값을 치르고, 잡기에도 뜨거운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올 때면 행복해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가끔은 미처 참지 못하고 뜨거운 도나스를 한입 베어 물었다가, 뜨거운 팥앙금에 입천장이 훌러덩 벗겨지곤 했다.
가끔 어머니가 시장에 가실 때면 따라가고 싶어 졸졸 뒤를 따랐다. 물론 내 속셈은 하나였다. 시장에서 파는 맛있는 간식, 그중에서도 도나스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식사 준비로 늘 바쁘셨던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채비만 하셨고,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기라도 한 듯 쉽게 데려가려 하지 않으셨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다 보면 어머니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안다.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것을. 돌아가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여기서 다가갔다가는 등짝을 후려치시는 어머니의 매서운 손을 피할 수 없었다. 잠시 대치가 이어졌다. 그러다 어머니가 손짓하며 오라고 하시면 표정을 먼저 살펴야 했다. 체념한 듯한 얼굴이면 몇 마디 잔소리로 끝났지만, 무표정한 얼굴이면 절대 다가가서는 안 됐다. 그렇게 몇 차례 실랑이가 이어지다 보면 어린 마음에도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오곤 했다. 정말 화가 나신 어머니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시면 나는 겁에 질려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거의 끌다시피 시장으로 데려가셨다.
그럴 때면 내 손에는 ‘눈물의 도나스’가 들려 있었고, 어머니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손으로 슥슥 닦아 주셨다. 철이 들고 나서야 알았다. 그 순간에는 자식이 안쓰러웠던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어머니에게 아이들 간식 하나도 결코 가벼운 지출은 아니었으리라.

청년이 되어 대학을 다니고 직장인이 된 뒤에도 어머니는 설탕을 잔뜩 묻힌 꽈배기와 도나스를 사 오곤 하셨다. 그때도 도나스는 내게 최고의 간식이었다. 맛있게 먹는 아들을 보며 “그게 그렇게 좋으냐.” 하고 웃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어린 시절 마음껏 사 주지 못했던 것이 오래 마음에 남으셨던 것일까. 어머니의 꽈배기와 도나스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나는 왜 혈당이 높을까. 열심히 관리하는데도 왜 정상 수치가 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문득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던 꽈배기와 도나스 때문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꽈배기와 도나스는 잘못이 없다. 내 혈당이 높아진 것은 건강할 때 내 몸을 소중히 돌보지 못했던 내 탓이다. 꽈배기와 도나스에는 죄가 없다. 그 안에는 자식에게 좋아하는 것을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고, 마음껏 사 주지 못했던 어머니의 미안함이 있었을 뿐이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쇼트닝에 튀긴 달디단 도나스를 한입 베어 물며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그때는 도나스보다 어머니 얼굴을 더 오래 바라보고 싶다.
에세이 기고_ 나상섭 대표이사